내가 사는 곳에서, 지속 가능한 놀음 찾기 Finding Sustainable Joy Where I Live
글 김나영 | 번역 이미래
자신의 자리에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것을 의미할까? 나는 이 물음이 두 가지 관점에서 삶을 돌이켜 볼 기회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내가 물리적으로 위치하고 있는 공간에서 내가 어떠한 상태인지를 성찰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내가 속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는 것이다. 우리는 특정한 사회, 특정한 물리적 공간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치열하게 살아나간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낳은 끝없는 경쟁과 자기계발의 압박 속에 좌절하다가도, ‘그래도 잘살아 보자’며 몸을 일으키고 자신의 위치에서 행복을 찾아 삶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평범한 우리네 삶이 흘러가는 모습이다. 나에게 ‘나의 자리에서 나이 드는 것’이란, 내가 물리적으로 위치한 장소에서 자생하고, 더 나아가 나의 사회, 내가 속한 공동체와 함께 잘 살아나가기 위한 모든 투쟁의 과정을 의미한다.
삶에 대한 성찰은 나의 정체성에 대해 탐색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이 정체성은 내가 살아가는 나라, 지역 또는 주변의 사람들 등 나와 연결된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형성된다. 환경의 변화에 따라 정체성은 여러 가지로 분화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온 20대 여성이다. 서울 변두리의 평범한 4인 가족의 막내딸로서, 그리고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다양한 정체성을 가져왔다. 15년 전 즈음에는 용마산 자락에 위치한 한 초등학교의 학생이었고, 5년 전에는 신촌의 한 대학교에 입학한 새내기 여대생이었다. 현재는 대학로의 한 문화예술기관에서 첫 사회생활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신입사원이고, 몇 달 뒤에는 외국인 노동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인 만큼 한국이라는 나라에 강한 애착이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만큼 긴 시간을 살아왔기에 이 나라와 사회에 대한 일종의 권태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개인을 집단의 틀로 재단하는 집단주의적 분위기, 한 살 한 살 엄격하게 나이를 따지고 서열을 매기는 유교 문화에 염증이 생겼다. 아직 더 놀고 싶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나에게 ‘얼른 취업해서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해야지’라며 덕담이라는 명목으로 구시대적 사상을 따르기를 강요하는 어른들의 태도에 진이 빠졌다. 이 조그마한 나라에 사람은 왜 이리 많은 것이며, 사회정치적 병폐는 어찌도 이리 많은지! 매일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 몸을 욱여 넣을 때마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몸살을 앓았다. 한국 사회가 드러낸 결점들은 결국 나를 지독한 염세주의에 빠트리고 말았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심의 축이 나라 바깥으로 이동한 것도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던 것 같다. 사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라 밖 세상은 그저 모두가 여유롭게 행복을 누리는 ‘굿 플레이스’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5년 전 이사를 온 뒤 쭉 살고 있는 우리 동네에도 정을 붙이지 않고 이방인으로 살아가기를 자처했다. 지역과 공동체로부터 나를 분리하고 거리를 두었으며, 내가 사는 나라와 동네, 이곳의 사람들, 내게 가까이 있는 모든 것의 가치를 절하하고 도외시했다. 내가 사는 환경이 비록 완벽할 수는 없을 지라도 분명 소중하게 여겨야 할 지점들이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한 것이다. 그저 어렸고, 철이 없었다. 이곳을 벗어나는 것만이 잘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패배주의적인 진단을 내리곤 했다.
이런 나에게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이다. 시간의 흐름은 자연스레 삶이라는 풍토에, 흔들림 없던 나의 고집에 변화의 씨앗을 가져다주었다. 사회적 패러다임의 전환과 함께 행동반경을 강제적으로 제한해야 하는 팬데믹의 상황이 맞물리면서 나의 삶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마냥 세계로만 향해있던 시선이 내가 사는 나라 안으로, 지역으로, 마을로 굽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나의 공동체, 내 주변의 것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스로 질문했다. 가까이 있는 익숙한 것들로부터 오히려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지루한 일상 속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찾을 수도 있다는 설렘에 두근두근 가슴이 떨렸다. 그동안 길거리의 배경으로만 여겼던 동네의 장소들을 기웃기웃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서, 지도와 사진에 압축된 평면적인 이미지가 아닌 생생하게 살아있는 지역을 만났고, 그곳을 채워나가는 이웃들에 다가섰다. 나는 그동안 내가 우물 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른 채 우물 바깥만을 내다보기에 급급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찾아온 변화를 기점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과 소통하면서 현재의 생태와 조건에 맞는 삶의 방식을 부지런히 개척하고 정제해 나가기로 했다. 공동체 안에서의 나의 역할,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형성되는 나의 정체성을 되짚어 보는 것과 동시에 이러한 변화는 크게 세 가지의 측면에서 진행되었다.
1. 로컬의 발견
서울시 도봉구 창동. 내가 살고 있는 곳이다. 서울의 중심보다는 경기도에 인접한 북부의 주거 지역으로, 정치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미미한 영향력을 가진 지역이다. 산이 있고 공원이 있고 아파트가 많고 고령화가 진행 중인, 평범한 사람 사는 동네다. 그러나 이토록 재미없어 보이는 도봉구에서도 소박하지만 풍요롭게 지역문화가 꽃을 피우고 있다. 프랜차이즈와 대형 기업들이 아닌 지역의 소상공민들, 개인 영세업자들을 중심으로 말이다. 내가 발견한 흥미로운 것은, 지역의 문화재단이 골목에 숨어 있는 작은 서점들과 협력해 정기 출판물을 발간하고 소셜 채널을 운영하며 구민들의 소소한 라이프스타일을 널리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동네를 오랫동안 지켜온 구멍가게들을 소개하고, 풍부한 ‘손맛’이 담긴 따뜻한 음식으로 많은 주민들의 배를 불려온 노포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대형 마트에 밀려 수입이 줄어가던 지역 소상공민들이 지역 사람들과 연결되기 시작한 것이다. 프랜차이즈 식당의 맛에 길들어 있던 우리가 잊고 있었던 가치들이 다시금 조명되면서 지역경제는 활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낡은 가게들 사이 청년 사업자들도 하나둘 둥지를 트면서 조용했던 거리가 꼬마부터 어르신까지 모든 세대의 주민들로 북적이게 되었다. 방치되었던 녹지들도 재정비되면서 주민들의 편안한 휴식처 역할을 하고 있다.
1시간 지하철을 타고 가서 한참 줄을 서야 안내받을 수 있는 홍대의 유명 카페에서 불공정 무역으로 수입된 커피를 마시는 것 대신, 이제 나는 집에서 10분 걸으면 발이 닿는 산자락의 둘레길을 거닐며 자연의 맑은 공기를 잔뜩 마신다.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오래된 식당에 들어가 주인 아주머니의 정성이 가득 담긴 푸짐한 음식으로 배를 채운다. 경제적 소비도 줄고, 힘도 덜 쓰고, 사람들과 부딪힐 일이 없으니 마음이 편안하고 기분도 상쾌하다. 행복은 이토록 가까이서 발견할 수 있는데, 나는 왜 주변의 것들에 눈길도 주지 않고 멀리 있는 것들만을 찾아다녔던 것일까. 우리는 우리가 사는 동네를 탐험하며 새로운 즐거움을 도처에서 손쉽게 찾을 수 있다.
로컬의 발견은 개인적 향유에서 그치지 않고 나의 사회를 건강하게 지속시키는 움직임(movement)으로 확장된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국가 단위의 글로벌 경제가 환경을 파괴하고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면서 마을과 지역사회 중심의 경제를 튼튼하게 하자는 지역화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전염병이 확산되는 오늘날의 상황은, 지역화(localization)로의 회귀가 글로벌 대자본을 증식시키는 세계화(globalization)의 질주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메시지를 불러왔다. ‘큰 그림 행동주의(Big Picture Activism)’의 개념을 창시한 로컬 경제 운동가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Helena Norberg-Hodge)는 초국적 기업과 기구들이 주도하는 세계화의 거센 물결에 저항하여 개개인이 마음을 모아 함께 연대할 수 있다면, 내가 살고 있는 지역뿐 아니라 지구촌도 행복한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1]. 세계로부터 지역으로 관점을 전환하는 작은 행동으로부터 변화가 시작된다. 내가 살아가는 지역의 다양한 가치를 발견하여 희망적인 삶의 방향을 모색하고 발전시켜 나간다. ‘지역 모험가’가 되어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탐색하는 일은 그 자체로 즐겁고 보람차다. 나의 작은 행동이 지역 경제의 활성화에 이바지하여 지속가능성의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즐거움은 배가 된다. 로컬의 발견은 내가 위치한 곳에서 잘 살아가고, 지역 공동체의 지속 가능한 미래에 기여하는 건강한 첫 걸음이다.
[1]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로컬의 미래』, (2018).
2. 내가 할 수 있는 일 모색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자아의 존재를 확립하고 성장하는 존재다. 임금의 여부와 상관없이 새로운 것을 학습하기 위해서 수업을 듣거나 동아리 활동, 봉사 활동 등 각종 일거리를 수행하는 것은 일을 통해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자 하는 인간적인 본성 때문일 것이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간다고 해도 문제는 없지만, 생산적인 활동을 하며 몸을 움직이고 머리를 쓰는 행위가 우리의 삶에 풍요를 더해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중요한 사실은 재미난 일거리를 찾기 위해서 굳이 멀리 이동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도 재미있는 일들이 매일 일어나기 때문이다.
지역화로의 회귀가 촉구되면서 지역단체와 마을기업 등을 중심으로 지역문화를 만들어가는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 역시 지역의 문화예술재단과 다양한 공공기관들이 이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우리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주변 이웃들과 잘 살아갈 수 있을까?’부터 ‘어떻게 하면 함께 즐거울 수 있을까?’로 이어진다. 외부자들이 아닌 지역 내부에 거주하며 지역을 애정하는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일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지역 안의 사람들이 하는 일과 그 역할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것들이 굉장히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매일 같은 시간 근린공원의 정자에 앉아 장기를 두며 함박 웃음을 터트리는 할아버지들, 동이 틀 즈음 마을회관 수영장에 모여 수영 수업을 들으며 세월에 굳어가는 몸을 일깨우는 아주머니들, 늦은 저녁 하루 일과를 마치고 한 자리에 모여서 각자의 창작 활동을 공유하며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청년 예술가들. 작고 평범하지만, 동네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재미를 추구하는 일을 지속하며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찾아 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지역 안에서 자신의 역할과 일거리를 찾아 이웃들과 교류하며 복작복작 살아가는 다양한 삶의 형태들이 지역에 활기를 돋우고 생명력을 더한다.
요즘 내 일상의 낙은 퇴근길 집 근처에 있는 단골 독립서점에 들리는 것이다. 대형서점에 비교해 규모는 작지만 책방지기의 책에 대한 애정이 공간 가득 묻어나는 곳이다. 매번 따뜻한 인사로 손님을 맞이해주는 책방지기와 가벼운 담소를 나누다보면 그날 쌓인 스트레스가 눈녹듯 해소된다. 그가 추천해주는 책을 한 권씩 사는 것은 하루를 산뜻하게 마무리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그는 책방에서 운영하는 일요 직장인 독서클럽에 나를 초대하기도 했는데, 아직 여러 이웃 앞에서 책을 이야기하기엔 부끄럼이 많아 조심스레 거절했다. 그 대신 내가 선택한 흥미로운 일거리는 최근 지역문화센터의 웹사이트를 기웃거리다가 발견한 플로깅(Plogging) 대회이다. 환경에 대한 지역사회의 경각심이 높아짐에 따라 구내에서 다양한 환경보호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는데, 이 플로깅 대회도 그 중 하나였다. 일정 기간 동안 동네의 하천을 따라 달리며 곳곳에 방치된 쓰레기를 줍고 사진과 함께 달리기 기록을 인증하면 ‘친환경 주민 뱃지’를 받을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나의 지역을 알아가고, 이웃들과 가까워지고, 더 나아가 사회적 가치에 기여할수 있는 기회는 생각보다 도처에 널려있다. 내가 사는 곳에서 내가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을지는 오롯이 나의 태도와 선택에 달려있다.
3. 느슨한 연대
우리는 사회적 동물의 한 종으로서 평생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모든 형태의 인간 집단’이라는 ‘사회’의 사전적 정의를 생각해보면, 타인과의 교류, 공동체와의 연결은 선택이 아닌 필수적인 삶의 요소로 보인다. 내가 소속된 곳, 나를 보살피는 가족, 나와 행복과 슬픔을 공유하는 친구가 있기에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사회라는 광활한 우주 안에서 안정감을 찾는다. 그렇지 않다면 끝없는 고립감과 외로움에 매몰된 불안한 존재가 되어 자신의 존재가치를 끝없이 의문할 것이다. 결국 타인과의 연결을 통해서 우리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들과 따뜻한 연대와 사랑을 나누며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타인과 지나친 연결로 인해 여러 문제점이 발견되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구축된 인터넷망은 사람들을 광활한 네트워크에 종속시킨다. 오래전 헤어진 연인의 소식을 의도치 않게 접하여 괴로워하고, 나의 근황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인터넷 선을 타고 바다 건너 낯선 이들에게 전해져 프라이버시 문제가 발생한다. 이와 같이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타인과 원치 않는 연결로 인해 오히려 몸살을 앓는다. 그러나 이러한 지나친 연결은 비단 인터넷상에서만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다. 지역 사회에서 이웃들의 선을 넘는 간섭 역시 피로감을 준다. 특히 한국 사회와 같이 개인보다 집단이 우선시되는 풍토 속에서 타인의 ‘오지랖’은 ‘정’이라는 탈을 쓰고 개인들을 괴롭힌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집단으로 얽히고설킨 사회에서, 행복의 원천이 되어야 할 인간관계는 오히려 불행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나를 잘 아는 사람과의 관계에 수반되는 감정노동이 두려웠던 나는 의식적으로 모든 사람들과 거리를 둬왔다. 그러나 이로 인한 외로움에 결국 다시 사람을 찾았고, 그들과의 연결이 강해지기 전에 그들을 밀어내기를 되풀이했다. ‘혼자이고 싶은데 혼자이긴 싫어’를 외치던 내가 발견한 것이 작은 공통점으로 연결된 타인과의 적당한 거리감이 있는 관계, 바로 느슨한 연대의 개념이었다. 대면 활동이 축소되던 시기에 사람에 대한 갈증을 느끼던 나는 지인의 권유로 지역 예술학 모임에 참여했다. 공통점 하나 없어보이는 남녀노소의 다양한 사람들이 예술학이라는 관심사만을 구심점 삼아 매주 동네 카페에서 같은 시간에 모였고, 통성명 하나 없이 예술과 철학, 그리고 삶에 대한 열띤 수다를 나누다가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은 내가 요새 어떤 책을 읽고 있는 지, 어떤 영화를 즐겨보는 지, 삶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았지만, 나의 직업, 경제력, 내가 지닌 현실적인 고민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이곳의 언어는 논리적인 설명과 설득 대신 자신을 순간순간 휩쓰는 솔직한 감정과 자유로운 직관으로 이루어졌다. 편견과 선입견이 부재한 자리에 이해와 존중이 들어섰다. 이곳의 사람들은 각자의 작은 세계 속에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었지만, 나는 이러한 시간을 통해 모두의 세계가 이어지고 있음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기존의 강한 연결에 기반한 관계가 피로감을 주었다면,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관계는 일상에 건강한 자극이 되었고 매일 설렘 속에 시작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불필요한 감정 소모와 물질적인 계산 없이 서로의 일부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이 적당한 거리감이 그들과 있을 때 온전한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했다. 각자의 공간을 가진 개인들이 느슨하게 연결된 공동체에서 타인을 알아가고 나 스스로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남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건강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공간이 확보되어야 한다. 나 스스로를 돌보고 보살필 수 있도록 여유를 제공하는 개인의 공간은, 갈수록 연결망이 촘촘해지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더욱 중요하게 여겨져야 할 가치이다. 타인에 사랑과 연민을 베푸는 것을 멈추자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이 스스로의 영역을 가질 수 있도록 적당한 거리를 두자는 것이다. 사회안전망의 개념이 사라지고 있는 이 시대에 함께 사는 이웃과 만든 느슨한 공동체가 인간관계의 빈틈을 메워줄 수 있다. 또한 느슨한 연대는 인간을 사회적인 틀에 고정시켜 전형적인 인간을 양산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반기를 드는 개념이다. 느슨한 연대의 관계는 획일적인 가치를 강요하는 사회로부터 탈피하여 우리의 인생에 뜻밖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우연을 가져온다. 사회가 규정한 통계적 전형성에 소음을 끼워 넣어 단조로운 삶의 리듬에 변주를 주는 것이다. 개인을 옭아매는 강한 연결로부터 벗어나, 우리는 느슨한 관계가 불러오는 우연성과 비정형성을 통해 다양한 기회에 부딪히면서 반복적인 일상에서의 새로운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 늘 똑같아 보이는 익숙한 공간 안에서 내가 발견하지 못했던 다양성과 가능성을 찾다 보면 단조로운 일상의 리듬에 뚜렷한 변화가 생긴다.
1년 뒤, 10년 뒤, 혹은 50년 뒤의 나는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지 예상할 수 없다. 아마도 서울의 동네 체육관에서 주말마다 스피닝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는 아주머니가 되어 있을 수도 있고, 어디 지구 반대편, 이를테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매일 아침 빵을 굽는 할머니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단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지위나 물질적 풍요와 상관없이, 나는 여전히 내가 있는 자리, 내가 속한 커뮤니티를 이루는 모든 것들과 상호작용하며 나이 들어가는 과정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을 거라는 것이다.
김나영. 일상의 질서가 흐트러지는 순간을 열망하는 사람. 세상은 비뚤어진 시선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굴러가야 된다고 믿는다. 좋아하는 건 음악, 영화, 여행. 미시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며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을 주제로 글을 쓴다.
일상의 서울을 그리는 삽화가, 도아마이다. 남해 바다의 땅끝마을을 떠나 6년째 서울 도심 한복판에 살고 있다. 지루하고 심심했던 서울살이 이전의 시간들을 그리워하며 그 마음을 그림으로 풀어낸다. 스스로가 그림을 통해 찾은 마음의 평화가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 닿았으면 한다. | IG: @_aamado_